18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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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68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남북 전쟁 이후 흑인 노예 출신들의 시민권과 재건 문제를 둘러싸고 공화당의 율리시스 S. 그랜트와 민주당의 호레이쇼 세이무어 간의 대결로 치러졌다. 그랜트는 흑인 참정권을 지지하며 "평화를 갖자"는 구호를 내세웠고, 세이무어는 백인 우월주의를 내세우며 재건 시대 종식을 주장했다. 선거 결과, 그랜트가 일반 투표와 선거인단 투표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흑인 투표권 보장을 위한 수정 헌법 제15조 통과의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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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수정 헌법 제14조는 시민권, 적법 절차, 평등 보호 등을 규정하며, 흑인 시민권 보장을 위해 제정되었고, 출생지주의 원칙을 명시하여 미국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며, 차별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고, 의회는 이 조항들을 시행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할 권한을 가진다. - 1868년 미국 - 1868년 미국 상원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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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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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선거 개요 | |
선거 이름 | 1868년 미국 대통령 선거 |
국가 | 미국 |
국기 연도 | 1867년 |
선거 유형 | 대통령 선거 |
진행 여부 | 아니오 |
이전 선거 | 1864년 미국 대통령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864년 |
다음 선거 | 1872년 미국 대통령 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872년 |
투표율 | 80.9% |
투표율 변화 | 4.6% 증가 |
선거 날짜 | 1868년 11월 3일 |
후보 1 | |
![]() | |
후보 이름 | 율리시스 S. 그랜트 |
소속 정당 | 미국 공화당 |
출신 주 | 일리노이주 |
러닝 메이트 | 스카일러 콜팩스 |
선거인단 투표수 | '214' |
승리 주 | '26' |
득표수 | 3,013,421 |
득표율 | 52.7% |
후보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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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이름 | 호레이쇼 시모어 |
소속 정당 | 미국 민주당 |
출신 주 | 뉴욕주 |
러닝 메이트 | 프랜시스 프레스턴 블레어 주니어 |
선거인단 투표수 | '80' |
승리 주 | '8' |
득표수 | 2,706,829 |
득표율 | 47.3% |
선거 결과 | |
선거인단 | 294명 |
당선에 필요한 선거인단 수 | 148 |
대통령직 | |
선거 전 대통령 | 앤드루 존슨 |
선거 전 대통령 소속 정당 | 국민연합당 (미국) |
선거 후 대통령 | 율리시스 S. 그랜트 |
선거 후 대통령 소속 정당 | 미국 공화당 |
2. 배경
남북 전쟁 이후, 흑인 노예 출신들의 시민권은 연방에서 뜨겁게 논쟁이 된 문제였다. 그랜트는 의회의 급진 공화당원들의 재건 계획을 지지했는데, 이 계획은 흑인 해방 노예들을 위한 완전한 시민권과 투표권(투표할 권리)을 포함한 수정헌법 14조를 지지했다. 민주당 강령은 그러한 권리를 "흑인의 지배"로 비난하며 남부 주들이 성인이 된 해방 노예들의 투표를 허용할지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포함한 주권의 회복을 요구했다. 전 연방 남부 주들은 해방된 노예들의 시민권을 제한하려고 했으며,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1]
민주당에서는 여러 후보가 경쟁했다.
재건 시대는 남부뿐 아니라 북부에서도 뜨거운 논쟁거리였다. 시모어는 역사학자 데이비드 브라이트가 "미국 역사상 가장 노골적인 백인 우월주의 선거 운동"이라고 부른 선거 운동을 "이 나라는 백인의 나라이며, 백인이 지배해야 한다"는 슬로건으로 전개했다.[1]
3. 후보 선출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초기에는 어느 정도 지지를 얻었으나, 남북 전쟁 직후 재건 문제에서 미숙함을 보였고 자신의 후원 조직을 활용하여 지지 기반을 다지지 못했다. 결국 민주당은 존슨 대통령 대신 다른 후보에게 투표했다.
3. 1. 공화당
1868년 5월, 공화당 전당대회는 만장일치로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3] 하원 의장이었던 슐라일러 콜팩스는 여섯 번째 투표에서 오하이오 상원의원 벤저민 웨이드를 제치고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3]
1868년 공화당 후보 | |||||||||||||||||||||||||||||
율리시스 S. 그랜트 | 슐라일러 콜팩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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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 | '부통령 후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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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대 미국 육군 참모총장 (1864–1869) | 제25대 미국 하원 의장 (1863–186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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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강령은 14차 수정헌법에서 약속한 흑인 노예 출신들의 완전한 시민권의 일환으로 흑인 참정권을 지지했다.[3] 또한, 미국 채권 상환에 녹색화폐를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고, 이민을 장려하며, 귀화 시민의 완전한 권리를 지지하고, 앤드루 존슨 대통령의 관대한 정책과는 다른 급진적 재건을 옹호했다.[3]
3. 2. 민주당
앤드류 존슨 대통령이 탄핵 위기까지 겪으면서 재선 도전을 포기한 후, 민주당은 1868년 7월 전당대회를 열었다. 22차례의 투표 끝에 호라시오 세이무어 전 뉴욕 주지사가 조지 펜들턴 전 하원의원, 토마스 헨드릭스 상원의원, 윈필드 핸콕 장군 등을 제치고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4]
1868년 민주당 후보 | |
'대통령 후보' | '부통령 후보' |
-- | ![]() |
제18대 뉴욕 주지사 (1853–1854 & 1863–1864) | 미국 하원 미주리주 제1선거구 대표 (1857–1859, 1860, 1861–1862, & 1863–1864) |
선거 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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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전당대회는 1868년 7월 4일부터 9일까지 뉴욕시에서 열렸다. 당 지도자들은 재건 시대의 종식 외에는 거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고,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동부 민주당원들은 전쟁 채권을 금으로 상환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 채권의 상당수는 가치가 크게 떨어진 지폐로 매입된 상태였다. 반면 서부 민주당원들은 “오하이오 아이디어”, 즉 지폐로 상환하는 것을 주장했다. 부채에 시달리는 농부들은 유통되는 화폐가 많아지면 빚을 갚기 더 쉬워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하이오 아이디어는 민주당 강령의 일부가 되었지만, 후보의 공약은 되지 못했다.[4]
초기 투표에서는 조지 H. 펜들턴(1864년 민주당 부통령 후보)이 가장 앞섰다. 그는 처음 15번의 투표에서 선두를 달렸고, 그 뒤를 앤드루 존슨 대통령, 윈필드 스콧 핸콕, 샌퍼드 처치, 아사 패커, 조엘 파커, 제임스 E. 잉글리시, 제임스 루드 둘리틀, 토머스 A. 헨드릭스가 따랐다. 탄핵을 간신히 모면했던 존슨은 첫 번째 투표에서 65표를 얻었지만, 이는 후보 지명에 필요한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였다. 결국 존슨은 대통령직 재선에 실패했다.[4]
한편, 전당대회 의장이었던 호레이쇼 세이무어 전 뉴욕 주지사는 네 번째 투표에서 노스캐롤라이나주로부터 9표를 받았다. 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큰 환호와 열렬한 박수”가 터져 나왔지만, 세이무어는 후보 지명을 거절했다.[4]
일곱 번째 투표까지 펜들턴과 헨드릭스가 두 명의 선두 주자로 떠올랐고, 핸콕이 이 시점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는 유일한 다른 후보였다. 여러 번의 결정적이지 않은 투표 끝에 존 T. 호프만, 프랜시스 P. 블레어, 스티븐 존슨 필드의 이름이 후보로 제시되었지만, 이들 중 누구도 상당한 지지를 얻지 못했다.[4]
21번의 투표에서 서로 대립하는 후보들이 격돌했다. 동부와 서부가 주도권을 놓고, 보수파와 급진파가 싸웠다. 펜들턴의 지지는 15번째 투표 이후 무너졌지만, 헨드릭스가 아닌 핸콕에게 넘어갔고, 전당대회는 여전히 교착 상태에 빠졌다. 두 명의 주요 후보는 상대방이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지 못하도록 막으려 했고, 전당대회의 3분의 2 규칙 때문에 타협 후보가 필요했다. 세이무어는 살몬 P. 체이스 대법원장이 후보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22번째 투표에서 오하이오 대표단 의장은 세이무어를 후보로 지명했다.[4]
세이무어는 다시 한번 후보 지명을 사양했지만, 그가 홀을 떠난 사이 전당대회는 만장일치로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지친 대표들은 존 A. 맥클레넌드, 어거스터스 C. 도지, 토머스 이윙 주니어가 후보직을 사퇴한 후 첫 번째 투표에서 만장일치로 프랜시스 프레스턴 블레어 주니어 장군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블레어의 지명은 동서뿐만 아니라 남북을 아우르는 균형 있는 후보단을 만들고자 하는 바람을 반영한 것이었다.[6]
4. 선거 운동
1868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남북 전쟁 이후 재건 문제를 둘러싸고 공화당과 민주당이 첨예하게 대립한 선거였다.
공화당 후보 율리시스 S. 그랜트는 "평화를 갖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흑인 참정권을 포함한 급진적 재건 정책을 지지했다.[3] 그는 흑인 노예 출신들의 완전한 시민권 보장을 약속한 14차 수정헌법을 지지하며, 녹색화폐 사용에 반대하고 이민을 장려하는 등, 앤드루 존슨 대통령의 정책과는 다른 급진적인 재건을 옹호했다.[3]
반면, 민주당 후보 호레이쇼 세이무어는 노골적인 인종차별적 선거 운동을 펼쳤다. 그는 그랜트를 "흑인 후보", 자신을 "백인의 후보"로 묘사하며,[9] 흑인 참정권을 "흑인의 지배"로 비난했다. 또한, 남부 주들이 해방 노예들의 시민권을 제한하고 스스로 투표 허용 여부를 결정할 권리를 주장하며 민주당 지지를 호소했다.
프랜시스 P. 블레어 부통령 후보는 과격한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제임스 O. 브로드헤드 대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번 경쟁에서 진정으로 유일한 쟁점은 급진 공화당원들이 남부에 강요한 재건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라고 주장했다.[8] 또한 연설을 통해 "우상을 숭배하고 일부다처제를 행하는 준 야만적인 흑인 종족"의 지배와 "백인 여성을 그들의 제멋대로의 욕망에 복종시키려는" 위험을 경고하며, 공화당을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자로 묘사했다.[11]
이에 공화당은 블레어가 대통령직을 승계할 수도 있다는 점을 경고하며, 시모어에 대한 반대표를 유도했다.[11]
선거 운동 막바지에 시모어는 블레어의 급진적 발언과 거리를 두며, 남부 문제는 국가 간섭 없이 주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모든 주의 즉각적인 복귀, "주 시민에 의한 주 선거권의 규제", 과거 정치적 범죄에 대한 사면을 주장하며,[14] 주의 민정 당국이 군사 작전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대통령과 대법원을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국가적 우선순위를 재정립하는 데 신중을 기할 것이라고 약속했다.[15]
하지만, 동부의 "금본위제" 민주당원이었던 시모어는 오하이오 아이디어(Ohio Idea)를 거부하여 당 서부의 지지를 잃었고, 이는 결국 선거 패배의 한 원인이 되었다.[16]
한편, 그랜트는 과거 발표했던 반유대주의적인 제11호 군령에 대해 사과하며, "나는 종파나 인종에 대한 편견이 없으며, 각 개인이 자신의 공적으로 평가받기를 원한다"라고 밝혔다.[10]
5. 선거 결과
18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율리시스 S. 그랜트가 일반 투표와 선거인단 투표 모두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랜트는 3,013,650표(52.7%)를, 호라시오 세이무어는 2,708,744표(47.3%)를 획득했다.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그랜트가 214표, 세이무어가 80표를 얻었다. 미시시피주, 텍사스주, 버지니아주는 재건 과정에 있어 선거에 참여하지 못했고, 플로리다주에서는 주 의회가 그랜트에게 선거인단을 투표했다.[38]
대통령 후보 |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선거인단 득표 |
---|---|---|---|---|
율리시스 S. 그랜트 | 공화당 | 3,013,650 | 52.7% | 214 |
호라시오 세이무어 | 민주당 | 2,708,744 | 47.3% | 80 |
계 | 5,722,440 | 100.00% | 294 |
당시 정치 엘리트들은 인기 투표 결과가 접전이었던 것에 놀라움을 표했다.[17] 공화당 하원의원 제임스 G. 블레인은 그랜트의 근소한 인기 투표 승리를 "매우 놀라운 사실"이라고 언급했다.[18]
민주당은 해방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대거 그랜트에게 투표한 남부 대부분 지역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공화당은 조지아주와 루이지애나주를 제외한 모든 남부 주에서 승리했는데, 이 두 주에서는 쿠 클럭스 클랜과 백색 카멜리아 기사단의 폭력과 부정행위로 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했다.[21]
국경 주였던 켄터키주, 메릴랜드주, 델라웨어주는 압도적으로 민주당이 승리했다. 특히 켄터키주는 급진적 재건에 대한 적대감의 영향으로 남북 전쟁 후 첫 번째 주 정부가 거의 전적으로 남부 연합군 출신으로 구성되기도 했다.[22]
미주리주와 웨스트버지니아주는 모두 공화당의 통제하에 있었고, 그랜트에게 선거인단 투표를 행사했다.[27]
이 선거는 공화당이 1920년까지 테네시주에서 승리한 마지막 선거였고, 민주당이 1912년까지 오리건주에서 승리한 마지막 선거였으며, 공화당이 1904년까지 미주리주에서 승리한 마지막 선거였다.
5. 1. 주별 결과
공화당민주당
투표수
투표수
투표수